“그레고리력*이 도대체 뭐라는 거야?”
(*역대 수능 언어영역 최고난도로 손꼽히는 지문이다.)
수능 시험장을 나서며 친구들은 언어영역을 출제한 익명의 국어학자를 욕했다. 실제로 그해 언어영역은 전무후무한 불수능으로 유명한데, (약간 자랑이지만) 난 잘 봤기 때문에 우쭐해져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뱉고야 말았다.
“야, 수능 별것도 아닌데? 그냥 모의고사랑 똑같잖아. 또 봐도 되겠다”
그랬다. 말이 씨가 되어 이듬해 두 번째 수능을 보게 되었다. (난 언어영역 빼고 나머지는 폭망했다.)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는데 수능에서는 통하지 않는 표현이었다.
인생 두 번째 수능일. 그해 언어영역은 전년도를 의식했는지 물수능이었다. 그런데 정작 나는 열심히 준비한 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손이 떨려서 연신 OMR카드 마킹을 실수했다. 원래는 지문에 밑줄 치지 않아도 읽고 바로 문제를 풀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밑줄 없이는, 아니 밑줄을 쳐도 한 줄 읽기가 버거웠다.
집에 갈까? 지금 가면 엄마가 뭐라고 할까? 어디 걷다가 시험 끝나는 시간 맞춰서 집에 들어갈까? 이래서 1교시 끝나고 뛰어내리는구나…
쉬는 시간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만큼 멘탈이 처참하게 무너졌다. 그래도 화장실에서 눈물을 찍어 닦으면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2교시 시험을 보러 들어갔다. 이미 망했다고 생각하니 왠지 자신감이 생겼다. 어차피 망한 거 엄마가 새벽부터 정성스럽게 싸준 도시락이나 맛있게 먹고 가자!는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.
그렇게 사회탐구영역까지 마치고 털레털레 걸어가며 첫 수능 때보다 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. 전례 없는 물수능인데 언어영역을 망쳐서 문과생으로서는 인서울에 갈 만한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.
이제는 정말 끝이라고? 삼수하면 뭐가 달라질까? 또 지옥 같은 재수종합반에 가고 싶진 않은데… 초중고부터 재수까지 13년을 들이부은 결과가 이거라고? 내 인생은 끝났고,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. 이제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?
성인이 되었지만 삶의 목표는 빼앗긴 스물. 어른들은 영어 공부를 해야 할 시기라고 했지만, 그것이 수능을 대체할 만큼 커다란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. 당장 정해진 길이 없기에 갈팡질팡 살았다. 뜻밖에 대학에 합격하기 전까지.